Conklin, Abbott, Mahone, 그리고 Bosch

과학의 영역에서 판단의 근거는 ‘숫자’다. ‘가설 A가 입증되는 이유는 그림 K에 나타난 물리량 J의 변위가 Y 값 이하 또는 이상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는 내용은 정량화가 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러니, 이것은 순전히 개인의 감상에 속한 영역이고, 판단의 근거는 본인의 감상평에 있다.


Alexander Conklin (Chris Cooper, The Bourne Identity, 2002)

맷 데이먼의 액션 연기를 인정사정없이 흔들리는 hand-held로 담아낸 The Bourne Series는 첫 편의 개봉으로부터 21년이 흐른 지금에도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껏 다섯 편이 개봉했으나, 많은 사람이 네 번째 편 The Bourne Legacy(2012)와 다섯 번째 편인 Jason Bourne(2016)을 제외한 첫 세 편을 진정한 ‘본 시리즈’ 삼부작으로 칭하기도 한다.

‘본 시리즈’의 미덕은 기존의 첩보/액션물에서 답습하던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수트를 차려입은 스파이가 미녀 여주인공과 얽히면서 악의 축을 개박살 낸다’라는 공식에서 멋지게 벗어난 점에 있다. 아니 오히려 요소 요소 같은 공식에서 정반대의 변수들을 차용하고 있다. 게다가 영화를 통해 ‘굿 윌 헌팅’ 때와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은 이십여 년 전 맷 데이먼의 현란한 액션 연기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맷 데이먼이 끌고 가는 영화이긴 하나,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의 완성은 첫 편과 둘째 편에 등장한 Alexander Conklin과 (Chris Cooper) Ward Abbott (Bryan Cox)의 명연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다섯 번째 편을 진정한 ‘본 시리즈’에 포함하지 못하겠다는 이유 역시 Tommy Lee Jones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Ward Abbott (Bryan Cox, The Bourne Supremacy, 2004)


여기, 또 다른 남자가 있다. Alexander Mahone (William Fichtner, Prison Break). 약에 절어 사는 연방 요원이긴 하나 본인의 일 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잘 해낸다. 본인의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잘하지만, 사교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그저 약과 일. 둘만이 세상에 존재한다. Conklin과 Abbott이 극중 배역에 찰떡으로 녹아들어 극과 배역 사이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극한의 궁합을 보여주었다면 Mahone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매력을 보여준다. 소위 ‘전문가’로 내세워지는 수많은 캐릭터가 있지만, 야누스의 얼굴처럼 흑과 백을 한 얼굴에 공존시킨 채 그 둘 사이의 마찰 속에서 소모되어 가는 개인적 고통을 절묘하게 표현한 점에서 나는 Mahone에 커다란 박수를 보낸다.

Alexander Mahone (William Fichtner, Prison Break, 2006)


그런 면에서 Harry Bosch (Titus Welliver)는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매력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담아내고 있다. 그저 이곳저곳의 미덕을 적당히 하나씩 가져와 버무려놓은 것을 시청자 앞에 던져둔 것이 아니라, Harry Bosch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아!’ 하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숱하게 본 미국 드라마의 어딘가에서 분명히 본 그때 그 사람. 주연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그때 그 사람이 로스앤젤레스 3급 형사가 되어 자기 일을 묵묵히 그리고 동시에 엄청나게 잘, 그러나 많은 경우에 주변과의 마찰을 일으키면서 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마찰은 많은 경우 인간 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모두 그러하듯, 항상 마음 한편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 대 사람 사이의 관계 말이다. 험한 소리 하기 싫어서 차마 내치지 못하는 직장의 저 사람. 역시 비슷하거나 같은 이유로 차마 싫은 소리 하지 못했던 오랜 친구. 동네 주민. 그런 무수한 관계들 말이다.

The Wire (HBO, 2002-2008)의 팬이라면 Lance Reddick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는 뉴욕 컨티넨탈 호텔 컨시어지를 통해 더욱 기억에 남게 된 배우. Omar로 기억되는 Michael Kenneth Williams (1966-2021)이 이태 전 세상을 떠났고, Lance Reddick이 올해 3월에 작고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Lance Reddick과 더불어 The Wire의 흑막 중 한 명이었던 Jamie Hector를 Bosch 바로 곁에서 감상할 수 있다.

자, 이쯤 되면 Bosch,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Harry Bosch (Titus Welliver, Bosch, 2014-202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학 2학년 때 현대물리학 수업을 2학기에 걸쳐 1년 동안 수강했었다. Arthur Beiser 라는 사람이 지은 거무칙칙한 표지의 교재 한 켠에는 (아마도 지금 기억하건대 파동방정식을 설명하기 전후였던 것 같다)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했다는 말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었다. 나는 어찌된 이유인지 수업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 짜투리 토막글을 본 후로 그말을 가슴 속에 묻고 끊임없이 환기해왔다.

"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

주지하지 않아도 누구나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잘 안다. 삶은 얼마나 충실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가에 따라 progress bar가 한 칸, 두 칸 차오르는 그런 종류의 게임이 아니다. 어찌됐든, 누구나 삶은 살아지게 된다. 삶이 개똥 밭을 이리 저리 굴러다녀도, '그래도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간다'고 했다.

삶은 '오직' 과거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어지럽게 뻗어나간 실개천 지류들처럼,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되짚어 거슬러 올라가보는 수 밖에 없다.

캐시는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한다. 사소해보이는 어떤 지점, 혹은 특별했던 사건들을 가리지 않고 지난 일들을 반추한다. 그것이 마치 본능이라는 듯이.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그녀 앞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사건을 넘어서 그녀에게 주어진 삶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녀는 화랑에 걸리게 될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을 이해하려는 행위로서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증명하고 있었다.

작가는 소설을 빌어 답에 닿을 수 없는 질문을 나지막히, 요란하지 않은 방식으로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 정답은 아닐 수 있겠으나 모종의 분위기로 대답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만 같다. 축축한 습지에 들어선 난파선. 분에 못 이겨 허공에 팔을 휘두르는, 아끼는 셔츠에 진흙이 온통 묻은 토미. 있어야 할 제자리를 잃고 읽어버린 물건들. 죽음에 이르기 전 도달하는 작은 명징의 섬.

그녀가 헤일셤에서부터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크리시가 죽었고, 간병하던 루스가 떠났다. 캐시는 토미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얼마간 흘렸지만 자제력을 잃지도, 흐느끼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야할 곳을 향해 출발'함으로써 그녀 앞에 놓여진 헤일셤 ㅡ 코티지 ㅡ 간병사 ㅡ 기증자로 이어지는 삶의 노선을 이어갔다. 우리 모두가 예외없이 종국엔 죽음에 이르게 되듯이.

나는 이들의 슈퍼팬은 아닌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를 매료시켰던 것들은 한 쪽의 재생을 마치면 일일이 손으로 뒤집어줄 필요가 없는 오토리버스 카셋트 테이프 플레이어, 두 가닥 이어폰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자그마한 리모콘이 달린 휴대용 씨디 플레이어 (게다가 이것은 안티-쇼크라는 신기술이 탑재된 것으로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버스를 붙잡기 위해 전력으로 뜀박질을 하여도 가방 속의 씨디 플레이어가 약 60초까지 안정적으로 음악을 재생할 수 있었다), 조금 더 크기가 작아진 - 결코 가질 수 없었던 - 새로운 형태의 전자 오락 기기, 이러한 것들이었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확실히 어떤 방향성을 향해 누가 만들었을지 모를 조류를 타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욱 (크기가) 작고, 더욱 (내부의 용량이) 크고, 사람의 손을 덜 가게 만드는 형태와 방향성을 시사했다. 나는 이런 것들의 팬이었다. 

까만 옷을 입은 빼빼마른 아저씨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여준 자그마한 화면을 가진 전자기기를 본 후로, 나는 2년 전 여름 방학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마련했던 생애 첫 노트북을 처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조금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이 회사가 만들어낸 다양한 종류의 제품들을 사용했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염탐해왔다. 이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세상에 발표할 때면 나는 하루 쯤 지나서 누군가의 블로그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정리된 글들을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나는 이 기업의 열성적인 지지자는 아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신제품 발표회를 라이브로 챙겨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주변의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이들의 물건들을 권하는 일도 없다. 책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이들의 슈퍼팬은 아닌 것 같다. 

동시에,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경쟁사의 제품엔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1원 한 푼도 소비하지 않았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혹은 그 외 다양한 형태의 일련의 ‘꾀임 방식’과는 인상적인 접점이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개인적인 생활의 상당 부분과 업무의 거의 전적인 부분을 경쟁사가 아닌, 이 회사의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금 십 삼년 전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달의 일정으로 떠난 처음 가보는 외국의 출장지에서 삼 주 동안의 작업을 마친 어느 아침, 갑작스레 노트북이 켜지지 않는 경험을 하고 나면 ‘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제품을 구매할 때 정말 값을 치르는 것은 제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일련의 (긍정적인) 경험, 연쇄작용,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발생하지 않은) 어떤 가능성이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샀던 그 노트북 혹은 그 계열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제품군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결코 ‘지속 가능한 솔루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업은, 혹은 영리 활동의 주체는 항상 영악하지만 친근한 모습을 한 악마의 형상을 띠고 있다. 어떻게하면 더 솜씨 좋은 친근한 악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책을 읽으며, 다소 모순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넘실대는 욕망이 가득 가득한 티비 스크린의 광고들을 보는 것을 포함하여) 이러한 악마에 내재한 인간적인 모습을 뜯어보는 일은 크나큰 즐거움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돈의 흐름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간의 심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거대한 대다수의 인간 군집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구 년째 사용하고 있는 헤드폰에서 알 수 없는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매끈하고 영롱한 모습을 갖춘 사과사(社)의 새 헤드폰을 두어 번쯤 생각하다가 몇 가지 이유로 그만 두기로 한다. 

잔인한 11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추운 겨울을 근근히 버텨내고 곧 따뜻한 봄을 목전에 두었지만

TS 엘리엇으로 하여금 전후 희망없는 암담한 현실이 오히려 4월을 잔인하게 보이게끔 만들었다고 했다.

전쟁으로 동료를 잃어버린 아픔을 투영하기 어려운 지금 세대에 있어서

여민 코트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결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차가워져가고

아무리 눈을 비비고 찾아보아도 달력에 빨간 날 한 점 보이지 않는,

그런 의미에서 11월은 잔인한 달이다.

카버의 단편소설은 잔인한 11월과도 같다.

그것은 차곡차곡 소리없는 발걸음을 옮겨왔다.

그제와 같은 어제였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었지만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입가에 걸린 흐릿한 팔자 주름에

살며시 흐려져가는 눈썹 언저리에

불행은 슬며시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그 어떤 시끌벅적한 파티나 환희, 가슴을 어루만지는 미사여구, 하늘을 향해 쏘아올려진 폭죽이나 예고와는 거리가 멀었다.

슬며시 내려와 발 아래 쌓여간 11월의 불행한 검은 눈발과도 같았다.

그것은 특별하지 않지만 어디에나 있었고, 모두의 주머니에 쉬이 한줌 들어갈만큼 작았으며,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몫이 돌아갔다.

My photo is introduced by ETH Zurich, in Instagram.

상실의 시대

p. 35

서른 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p. 37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버린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p. 115

내 이름은 미도리[綠]라고 해요. 그런데도 전혀 초록색이 안 어울려요. 이상하죠?

p. 39

그래서 나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글로 써보지 않고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p. 46

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p. 65

내겐 기즈키라고 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친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p. 108

대학 측이 기동대를 끌어들여 바리케이드를 파괴했을 뿐, 원칙적으로 동맹 휴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맹 휴학 결의 때에는 하고 싶은 만큼 큰소리를 치면서, 동맹 휴학에 반대하는 (혹은 의혹을 표명하는) 학생들을 매도하고, 혹은 규탄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들을 찾아가 왜 동맹 휴학을 계속하지 않고 강의에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을 못했다.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출석 일수가 모자라 학점을 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패거리들이 대학 해체를 외쳐댔구나, 하고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비열한 패거리들은 바람의 방향 하나로 큰소리를 쳤다, 움츠러들었다 하는 것이다.

p. 130

부자의 최대 이점이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모르겠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p. 140

어때, 믿을 수 있어요? 열대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손톱에 불이 붙은 듯 열심히 돈을 모아 소쿠리, 숫돌, 튀김 냄비 등등을 사들였다는 걸요.

p. 205

당신은 그때 왜 기즈키와 자지 않았느냐고 물었지요? 아직도 그게 알고 싶어요? 알고 있는게 좋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죽은 사람은 그대로 죽은 채지만 우린 앞으로 더 살아야 하니까요.

p. 229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치러야 할 때에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바람에 그 고지서가 이제야 되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기즈키는 그렇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 여기 있는 거고. 우린 무인도에서 자란 헐벗은 아이 같은 존재였어요. 배가 고프면 바나나를 따먹고, 외로워지면 서로 품에 안고 잠든 거지요. 하지만 그런 게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겠어요? 우린 자꾸만 자라고, 사회로 진출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였어요. 당신은 우리 둘을 바깥 세상과 이어 주는 고리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결국엔 잘 안 되었지만.

p. 70

나는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듯싶은 도쿄의 사립 대학을 택해 시험을 보았고, 특별한 어떤 기쁨도 없이 입학했다.

p. 49

창이 많이 달린 커다란 건물인데, 아파트로 개조한 교도소거나 교도소를 개조한 아파트 같은 인상을 준다.

p. 100

나는 그녀와 함께 카페로 들어가, 모닝 서비스로 주는 맛없는 토스트와 맛없는 계란을 먹고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p. 112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를 좋아하죠? 그건 꼭 파시스트 같아요. 정말 시시하다구요.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가 우아하며 마음이 상냥하고 여성답다, 그러는 걸까? 난 말예요, 머리가 긴 야비한 여자를 250명쯤은 알고 있어요, 정말.

p.123

내세우는 바는 제법 훌륭했고, 내용에도 특별한 이의는 없었으나, 문장에 설득력이 없었다. 둥근 얼굴이 한 연설도 피장파장이었다. 그 타령이 그 타령이었다. 똑같은 멜로디에 가사의 토씨만 다를 뿐이었다. 이 녀석들의 진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p.124

많이 기다렸죠? 뭐, 괜찮아. 난 시간이 너무 많이 죽을 지경이니까. 그렇게 한가해요? 내 시간을 좀 줘서, 그 속에 미도리를 잠자게 해줬으면 싶을 정도지.

p. 148

좋아, 알았어. 나도 너랑 같이 있겠어. 같이 죽어 줄래요? 하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설마, 위험해지면 난 도망칠 거야. 죽고 싶거든 너 혼자서 죽으면 되잖아. 냉정하네요. 점심 대접쯤 받았대서 같이 죽을 순 없잖아. 저녁 식사라면 또 몰라도.

p. 237

레이코 여사가 앵무새를 노려보며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내니까, 앵무새는 구석에 박혀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조금 후에 고마워, 미친놈, 빌어먹을 하고 외쳤다.

p. 298

우리는 역에서 전철을 타고 오차노미즈까지 갔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주쿠 역에서 갈아탈 때 역의 스탠드에서 형편 없는 샌드위치를 사 먹고, 신문의 잉크를 끓인 듯, 역겨운 맛이 나는 커피를 마셨다.

p. 333

다섯 시 반에 나는 책을 덮고 다방을 나와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일요일을 앞으로 몇십 번, 볓백 번 겪게 될 것인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하고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일요일에는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 것이다.

p. 440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감으로 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p. 440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 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p. 467

특히 와타나베의 편지 좋아해요, 나. 나오코는 다 태워 버렸지만...... 그렇게 좋은 편지였는데. 편지는 그저 종이일 뿐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 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아요.

p. 59

내가 돌격대와 그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를 하자 나오코는 킥킥 웃어댔다. 우스갯소리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나도 웃었다.

p. 76

그런 돌격대 이야기를 하면 나오코는 언제나 웃었다. 그녀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기에 나도 곧잘 그의 이야기를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Canon A35F 사용기

필름 카메라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것은 카메라만 보면 (선덕선덕) 가슴이 뛰는 사람이 이제껏 써 본 몇 몇의 카메라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실은 (현실적인 제약으로) 많은 카메라를 써본 것은 아닙니다. 없는 살림에 그나마 써볼 수 있었던 ㅡ 그리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ㅡ 몇 몇의 카메라에 관한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처음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었던 것은 2008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작고 검은색 벽돌처럼 생긴 아웃포커싱이 잘 된다는 blackbody Canon A35F 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듯, 그 카메라가 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아버지의 카메라’가 그것이었습니다. 빛 바랜 앨범 속 우측 하단에 선명히 날짜가 찍혀있는, 지금 보면 촌스러울 수 있는 사진들을 찍어준 옛날 카메라를 안 방 장롱 속에서 꺼내와 서울 을지로에 있는 카메라 수리점에서 4만원을 주고 고쳐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Canon A35F 사용설명서의 표지

Canon A35F는 ‘자동 카메라’ 입니다. 사용자는 초점을 맞추고 셔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초점 맞추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40mm 1:2.8 렌즈가 붙박이로 박혀 있는 이 작고 아담한 카메라는 뷰파인더조차 아담하여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초점 맞추는 일이 꽤나 고역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시력이 좋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양안 1.5 정도 됩니다. 전역 후 학교 보건소에서 측정했을 때 2.0이었습니다.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2년을 보냈더니) 초점을 맞추는 노란 가이드라인이 흐릿해서 종종 오랜 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초점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반신반의하기 일쑤라 한 장을 담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2008년은 이미 Canon에서 보급형 DSLR을 히트시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DSLR을 손에 쥐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Canon 400d가 국민 카메라로 각광 받고 있던 때로 기억합니다. 전국민이 사진가가 되어 가고 있던 즈음에, 78년도에 생산되기 시작한 자동 카메라를 쥐고서 초점이 맞았을까 안 맞았을까, 현상/스캔한 이미지는 어떨까를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싫거나 짜증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 느꼈던 불편함은 이후에 쓰게 된 카메라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 깨닫게 됩니다.

 

반셔터를 누르면 뷰파인더 내에서 실 같은 바늘이 ‘탱ㅡ’하고 올라와 (소리는 나지 않습니다. 다만 모양새가 그렇다는 이야기 입니다.) 적정 조리개 값을 가리켜 줍니다. 셔터 소리는 너무도 정숙하여 사진을 찍는 사람조차 간신히 들을 정도 입니다. 가볍게 ’쇽’ 소리가 나죠. 이렇게 몇 글자 적어내려가고 있는 중에도 그 셔터 소리가 귓가에 생생합니다. 

‘쇽’

Canon A35F는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저의 첫 카메라였습니다. 그리고 이 앙증맞고 투박하고 느린 카메라는 저로 하여금 다양한 카메라의 세계를 탐험하게 만든 인도자였습니다. 이후로 조금씩 돈을 모아서 카메라와 렌즈 그리고 조금 더 나은 필름들을 사용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추후 정리되는 대로 소개해볼까 합니다. 

Canon A35F로 담은 사진 몇 장으로 짧은 글의 마무리를 갈음합니다.

(Seoul, 2009)

 

 

 

(Oxford, 2009)

 

 

 

(Oxford, 2009)

 

 

 

(Washington D.C., 2010)

 

 

 

(Jeju, 2009)

 

 

 

(Jeju, 2009)

 

 

 

(Samcheong-dong, 2008)

 

 

 

(Washington D.C., 2010)

 

 

 

(Washington D.C., 2010)

 

 

 

(Jeju, 2009)

 

 

 

(Jeju, 2009)

 

 

 

(Sendai, 2009)

 

 

 

(Seoul, 2009)

Minolta XE-7, XG-M 사용기

필름 카메라 이야기 (2)를 해볼까 합니다. 이것은 카메라만 보면 (선덕선덕♥) 가슴이 뛰는 사람이 이제껏 써 본 몇 몇의 카메라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실은 (현실적인 제약으로) 많은 카메라를 써본 것은 아닙니다. 없는 살림에 그나마 써볼 수 있었던 ㅡ 그리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ㅡ 몇 몇의 카메라에 관한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Canon A35F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다보니 아쉬운 점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 rangefinder가 갖고 있는 최소 촬영 거리에 대한 제약 (약 70cm)
- 최대 개방 조리개 값이 2.8에 이르다보니 빛이 부족한 실내에서는 촬영이 매우 어려운 점 
- 특히나 역광에 대단히 취약한 40mm 1:2.8 붙박이 렌즈
-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용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점


위의 이유로 다른 카메라를 찾아보게 됩니다. 사용이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용이 더 불편하더라도 그래서 한 장을 담는데 더 오랜 시간과 수고가 들더라도 색다른 재미를 위해 다른 카메라를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는 분으로부터 잠깐 동안 빌려 써보게 된 것이 Minolta XE-7입니다. 이 카메라는 역시 아웃포커싱이 잘 된다는 blackbody 74년에서 77년 사이에 만들어진 Minolta XE의 북미 버전입니다. 유럽에는 XE-1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35mm SLR 카메라로서 Leica와의 콜라보를 통해 생산되어 Leica R3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도 합니다. 같이 빌린 렌즈는 Rokkor 50mm 1:1.4로 위에서 언급했던 취약점을 모두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최소 촬영 거리가 약 30cm 정도로 줄어들었고, 최대 개방 조리개가 1.4에 이르러 iso 400 이상의 필름을 사용하면 늦은 밤 실내에서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사진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셔터스피드와 조리개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 노출 오버와 언더를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조작 가능한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역광에도 Canon A35F가 보여주었던 것 만큼 취약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뷰파인더의 중앙부의 split-image가 무척 선명했습니다. Canon A35F의 희끄무레한 노란 상자에 비하면 Minolta XE-7의 split-image는 그 자체로 감동이었습니다.

Minolta XE-7
Minolta XE-7 (image credit:Flickr)

무엇보다도, Minolta XE-7을 짧은 시간 동안 사용하면서 저는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 번째는 화각입니다. 제게 50mm의 화각은 너무 비좁았습니다. Canon A35F는 40mm의 화각을 갖고 있는데 그보다 더 시야가 좁아졌습니다. 그리고 이 좁아진 시야는 갑갑함을 가져왔습니다. 뷰파인더 내의 세상은 더 없이 선명해졌지만 그 선명한 세상은 ‘좁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개인의 성향에 의존하는 문제로 제 성향을 파악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50mm 화각은 다시 찾지 않게 됩니다. (몇 년 후, 한 번 더 50mm 화각을 써 보고는 정말 정말 그 뒤로는 찾지 않게 됩니다.) 50mm 화각이 ‘나쁘다’라거나 ‘못 쓸 화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정된 예산으로 단 하나의 렌즈만을 선택한 점, 그리고 피사체가 대부분 정물과 풍경인 이유로 저는 35mm 라는 화각에 종착하게 되었습니다. 


Minolta XE-7 viewfinder

두 번째는 Minolta라는 카메라 브랜드 입니다. Minolta는 지금 시대에 저렴한 가격으로 괜찮은 카메라를 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카메라 브랜드입니다. 업으로 사진을 찍는 상업 사진사가 아닌 이상, 저처럼 취미로 이 동네 저 동네 마실 정도 다니며 그리고 간혹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어깨춤에 걸쳐메고 몇 롤의 필름을 소비하는 그런 아마추어에게 딱 적당한 카메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가격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Canon으로는 AE-1, Pentax에는 Me, Me Super, Nikon에는 FM2, FE2 정도가 저렴한 가격에서 구매할 수 있는 SLR 필름 카메라 입니다. 그러나 Nikon의 바디들은 저렴하긴 하나 Minolta의 X 시리즈에 비해 약 2배 가까이 비싼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물도 Minolta에 비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랬습니다. 지금은 또 다를지 모릅니다.)

최초 출시가를 두고 이야기한다면 이런 표현은 어불성설입니다. Minolta가 보통의 아마추어 취미 사진가들을 위해 만들어낸 카메라는 SR-T 시리즈였습니다. XE 시리즈는 프로 사진가를 위해 출시한 고급 라인의 카메라로서 출시가가 260 - 300 USD에 달했습니다. 물론 렌즈는 미포함, 바디만의 가격입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시대에 Minolta의 X, XD, XE 시리즈 바디들은 약 10만원 내외의 저렴한 가격으로 필름 사진의 매력을 맛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필름 회사들이 도산을 하고, 필름 가격이 상승하고, 심지어 단종되고, 동네에 하나씩 있던 현상소가 문을 닫고, 충무로의 현상소 마저 하나 둘 씩 사라져가는 이 시대야말로 사람들로부터 잊혀져가는 필름 카메라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절호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40여년이 지나 우리는 보다 저렴해진 가격으로 기계적 성능이 뛰어난 카메라를 써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상당 수 이러한 중고 카메라들이 이제 노년의 삶에 접어들었다는 점 입니다. Minolta XE-7 이후, 중고로 Minolta XG-M을 들여 사용한 지 3년 째에 와인딩 놉을 돌려도 셔터가 눌러지지 않아 남대문의 어느 수리점에서 5만원을 내고 수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반 년 후, 다시금 같은 증상에 충무로의 어느 수리점에 수리를 의뢰하러 갔을 때 일흔도 넘어뵈는 노년의 주인께서 카메라를 슬쩍 보고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게 사람으로 치면 여든이 넘은거에요. 여든이 넘었으니, 병원에 가서 고친들 그게 오래 안가요.”


다시 XE-7 이야기로 돌아와, 바디와 렌즈를 빌려준 분께 반납하고 10만원을 들여 중고 거래로 Minolta XG-M을 구매하게 됩니다. JCPenney 백화점의 상표가 붙어있는 35mm 1:2.8 렌즈와 함께 말이죠. 

Minolta XG-M
Minolta XG-M

 

 

Minolta XG-M의 셔터 버튼(왼쪽)과 viewfinder(오른쪽)
Minolta XG-M의 셔터 버튼(왼쪽)과 viewfinder(오른쪽)

2010년 초에 구매한 Minolta XG-M은 이후 카메라 가격의 3배를 주고 역시 중고 거래로 구입한 Minolta nMD 35mm 1:1.4 렌즈와 함께 저의 필름 사진 생활 속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담아준, 저와 함께 동네 마실부터 해외 출장까지 어디에나 함께 한 소중한 카메라로 자리 잡습니다. XG-M을 사용하는 동안 Leica M6와 iiif, Cosina의 Voigtlander Bessa R2, R2A 시리즈, Fujifilm의 Natura Classica, Olympus의 XA2 그리고 Nikon FE2를 사용하게 되지만 언제 어디서나 제 가방 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카메라는 바로 Minolta XG-M 이었습니다. 수많은 사진을 담아낸 XG-M은 몇 번의 고장과 수리를 거쳐 2013년 12월, 파란 창틀이 인상적이었던 호텔 나르시스 (체르마트, 스위스) 앞 길가에서 드디어 은퇴를 하게 됩니다. 영화 ‘친구’의 광고 카피가 ‘곁에 두고 오래 사귄 벗’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4년의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제게 이 XG-M이 그러했고, 소중했기 때문에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 카메라를 은퇴시키려 마음 먹었던 순간이 더 없이 특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향집 책상 서랍 속에 nMD 렌즈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XG-M의 마지막 컷 (Zermatt, Switzerland)
XG-M의 마지막 컷 (Zermatt, Switzerland)

Minolta XG-M과 nMD 35mm 1:1.4 렌즈로 담은 사진들로 짧은 글의 마무리를 대신합니다. (대부분의 사진에서 Kodak의 Portra 160NC, 160VC 그리고 차후 생산된 160과 400을 사용하였습니다)

 

 

 

Zurich, Switz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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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tingham,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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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gi,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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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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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rich, Switz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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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rich, Switz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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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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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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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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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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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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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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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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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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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ttle,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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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son,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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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ttle,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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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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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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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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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t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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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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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t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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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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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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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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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t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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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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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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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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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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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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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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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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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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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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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son,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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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son,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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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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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son,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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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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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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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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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son,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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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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