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 때 현대물리학 수업을 2학기에 걸쳐 1년 동안 수강했었다. Arthur Beiser 라는 사람이 지은 거무칙칙한 표지의 교재 한 켠에는 (아마도 지금 기억하건대 파동방정식을 설명하기 전후였던 것 같다)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했다는 말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었다. 나는 어찌된 이유인지 수업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 짜투리 토막글을 본 후로 그말을 가슴 속에 묻고 끊임없이 환기해왔다.
"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
주지하지 않아도 누구나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잘 안다. 삶은 얼마나 충실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가에 따라 progress bar가 한 칸, 두 칸 차오르는 그런 종류의 게임이 아니다. 어찌됐든, 누구나 삶은 살아지게 된다. 삶이 개똥 밭을 이리 저리 굴러다녀도, '그래도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간다'고 했다.
삶은 '오직' 과거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어지럽게 뻗어나간 실개천 지류들처럼,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되짚어 거슬러 올라가보는 수 밖에 없다.
캐시는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한다. 사소해보이는 어떤 지점, 혹은 특별했던 사건들을 가리지 않고 지난 일들을 반추한다. 그것이 마치 본능이라는 듯이.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그녀 앞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사건을 넘어서 그녀에게 주어진 삶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녀는 화랑에 걸리게 될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을 이해하려는 행위로서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증명하고 있었다.
작가는 소설을 빌어 답에 닿을 수 없는 질문을 나지막히, 요란하지 않은 방식으로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 정답은 아닐 수 있겠으나 모종의 분위기로 대답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만 같다. 축축한 습지에 들어선 난파선. 분에 못 이겨 허공에 팔을 휘두르는, 아끼는 셔츠에 진흙이 온통 묻은 토미. 있어야 할 제자리를 잃고 읽어버린 물건들. 죽음에 이르기 전 도달하는 작은 명징의 섬.
그녀가 헤일셤에서부터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크리시가 죽었고, 간병하던 루스가 떠났다. 캐시는 토미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얼마간 흘렸지만 자제력을 잃지도, 흐느끼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야할 곳을 향해 출발'함으로써 그녀 앞에 놓여진 헤일셤 ㅡ 코티지 ㅡ 간병사 ㅡ 기증자로 이어지는 삶의 노선을 이어갔다. 우리 모두가 예외없이 종국엔 죽음에 이르게 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