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

p. 35

서른 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p. 37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버린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p. 115

내 이름은 미도리[綠]라고 해요. 그런데도 전혀 초록색이 안 어울려요. 이상하죠?

p. 39

그래서 나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글로 써보지 않고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p. 46

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p. 65

내겐 기즈키라고 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친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p. 108

대학 측이 기동대를 끌어들여 바리케이드를 파괴했을 뿐, 원칙적으로 동맹 휴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맹 휴학 결의 때에는 하고 싶은 만큼 큰소리를 치면서, 동맹 휴학에 반대하는 (혹은 의혹을 표명하는) 학생들을 매도하고, 혹은 규탄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들을 찾아가 왜 동맹 휴학을 계속하지 않고 강의에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을 못했다.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출석 일수가 모자라 학점을 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패거리들이 대학 해체를 외쳐댔구나, 하고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비열한 패거리들은 바람의 방향 하나로 큰소리를 쳤다, 움츠러들었다 하는 것이다.

p. 130

부자의 최대 이점이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모르겠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p. 140

어때, 믿을 수 있어요? 열대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손톱에 불이 붙은 듯 열심히 돈을 모아 소쿠리, 숫돌, 튀김 냄비 등등을 사들였다는 걸요.

p. 205

당신은 그때 왜 기즈키와 자지 않았느냐고 물었지요? 아직도 그게 알고 싶어요? 알고 있는게 좋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죽은 사람은 그대로 죽은 채지만 우린 앞으로 더 살아야 하니까요.

p. 229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치러야 할 때에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바람에 그 고지서가 이제야 되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기즈키는 그렇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 여기 있는 거고. 우린 무인도에서 자란 헐벗은 아이 같은 존재였어요. 배가 고프면 바나나를 따먹고, 외로워지면 서로 품에 안고 잠든 거지요. 하지만 그런 게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겠어요? 우린 자꾸만 자라고, 사회로 진출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였어요. 당신은 우리 둘을 바깥 세상과 이어 주는 고리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결국엔 잘 안 되었지만.

p. 70

나는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듯싶은 도쿄의 사립 대학을 택해 시험을 보았고, 특별한 어떤 기쁨도 없이 입학했다.

p. 49

창이 많이 달린 커다란 건물인데, 아파트로 개조한 교도소거나 교도소를 개조한 아파트 같은 인상을 준다.

p. 100

나는 그녀와 함께 카페로 들어가, 모닝 서비스로 주는 맛없는 토스트와 맛없는 계란을 먹고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p. 112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를 좋아하죠? 그건 꼭 파시스트 같아요. 정말 시시하다구요.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가 우아하며 마음이 상냥하고 여성답다, 그러는 걸까? 난 말예요, 머리가 긴 야비한 여자를 250명쯤은 알고 있어요, 정말.

p.123

내세우는 바는 제법 훌륭했고, 내용에도 특별한 이의는 없었으나, 문장에 설득력이 없었다. 둥근 얼굴이 한 연설도 피장파장이었다. 그 타령이 그 타령이었다. 똑같은 멜로디에 가사의 토씨만 다를 뿐이었다. 이 녀석들의 진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p.124

많이 기다렸죠? 뭐, 괜찮아. 난 시간이 너무 많이 죽을 지경이니까. 그렇게 한가해요? 내 시간을 좀 줘서, 그 속에 미도리를 잠자게 해줬으면 싶을 정도지.

p. 148

좋아, 알았어. 나도 너랑 같이 있겠어. 같이 죽어 줄래요? 하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설마, 위험해지면 난 도망칠 거야. 죽고 싶거든 너 혼자서 죽으면 되잖아. 냉정하네요. 점심 대접쯤 받았대서 같이 죽을 순 없잖아. 저녁 식사라면 또 몰라도.

p. 237

레이코 여사가 앵무새를 노려보며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내니까, 앵무새는 구석에 박혀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조금 후에 고마워, 미친놈, 빌어먹을 하고 외쳤다.

p. 298

우리는 역에서 전철을 타고 오차노미즈까지 갔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주쿠 역에서 갈아탈 때 역의 스탠드에서 형편 없는 샌드위치를 사 먹고, 신문의 잉크를 끓인 듯, 역겨운 맛이 나는 커피를 마셨다.

p. 333

다섯 시 반에 나는 책을 덮고 다방을 나와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일요일을 앞으로 몇십 번, 볓백 번 겪게 될 것인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하고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일요일에는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 것이다.

p. 440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감으로 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p. 440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 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p. 467

특히 와타나베의 편지 좋아해요, 나. 나오코는 다 태워 버렸지만...... 그렇게 좋은 편지였는데. 편지는 그저 종이일 뿐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 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아요.

p. 59

내가 돌격대와 그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를 하자 나오코는 킥킥 웃어댔다. 우스갯소리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나도 웃었다.

p. 76

그런 돌격대 이야기를 하면 나오코는 언제나 웃었다. 그녀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기에 나도 곧잘 그의 이야기를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