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를 매료시켰던 것들은 한 쪽의 재생을 마치면 일일이 손으로 뒤집어줄 필요가 없는 오토리버스 카셋트 테이프 플레이어, 두 가닥 이어폰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자그마한 리모콘이 달린 휴대용 씨디 플레이어 (게다가 이것은 안티-쇼크라는 신기술이 탑재된 것으로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버스를 붙잡기 위해 전력으로 뜀박질을 하여도 가방 속의 씨디 플레이어가 약 60초까지 안정적으로 음악을 재생할 수 있었다), 조금 더 크기가 작아진 - 결코 가질 수 없었던 - 새로운 형태의 전자 오락 기기, 이러한 것들이었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확실히 어떤 방향성을 향해 누가 만들었을지 모를 조류를 타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욱 (크기가) 작고, 더욱 (내부의 용량이) 크고, 사람의 손을 덜 가게 만드는 형태와 방향성을 시사했다. 나는 이런 것들의 팬이었다.
까만 옷을 입은 빼빼마른 아저씨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여준 자그마한 화면을 가진 전자기기를 본 후로, 나는 2년 전 여름 방학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마련했던 생애 첫 노트북을 처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조금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이 회사가 만들어낸 다양한 종류의 제품들을 사용했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염탐해왔다. 이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세상에 발표할 때면 나는 하루 쯤 지나서 누군가의 블로그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정리된 글들을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나는 이 기업의 열성적인 지지자는 아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신제품 발표회를 라이브로 챙겨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주변의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이들의 물건들을 권하는 일도 없다. 책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이들의 슈퍼팬은 아닌 것 같다.
동시에,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경쟁사의 제품엔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1원 한 푼도 소비하지 않았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혹은 그 외 다양한 형태의 일련의 ‘꾀임 방식’과는 인상적인 접점이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개인적인 생활의 상당 부분과 업무의 거의 전적인 부분을 경쟁사가 아닌, 이 회사의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금 십 삼년 전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달의 일정으로 떠난 처음 가보는 외국의 출장지에서 삼 주 동안의 작업을 마친 어느 아침, 갑작스레 노트북이 켜지지 않는 경험을 하고 나면 ‘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제품을 구매할 때 정말 값을 치르는 것은 제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일련의 (긍정적인) 경험, 연쇄작용,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발생하지 않은) 어떤 가능성이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샀던 그 노트북 혹은 그 계열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제품군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결코 ‘지속 가능한 솔루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업은, 혹은 영리 활동의 주체는 항상 영악하지만 친근한 모습을 한 악마의 형상을 띠고 있다. 어떻게하면 더 솜씨 좋은 친근한 악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책을 읽으며, 다소 모순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넘실대는 욕망이 가득 가득한 티비 스크린의 광고들을 보는 것을 포함하여) 이러한 악마에 내재한 인간적인 모습을 뜯어보는 일은 크나큰 즐거움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돈의 흐름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간의 심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거대한 대다수의 인간 군집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구 년째 사용하고 있는 헤드폰에서 알 수 없는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매끈하고 영롱한 모습을 갖춘 사과사(社)의 새 헤드폰을 두어 번쯤 생각하다가 몇 가지 이유로 그만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