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morphology - density relation은 은하의 형태와 밀도 사이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일컫는다. 은하의 형태는 붉은색의 타원형 모습과 푸른색 나선 모습, 크게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이러한 형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해당 은하가 위치한 환경 요소, 즉 밀도인 것이다. 주변에 은하가 많이 위치한 고밀도 지역에서는 주로 붉은색 타원 은하가 관측되고, 은하가 적게 위치한 저밀도 지역에서는 푸른색 나선 은하가 많이 관측된다. 고밀도의 환경에서는 은하의 근접 접근이나 병합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은하 내부의 gas가 가열, 증발됨에 따라 별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차가운 gas가 제거되어 별 형성이 억제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새로운 별들이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게 됨에 따라 은하는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모양은 병합의 역사를 거쳐 타원형이 된다. 우주적 시공간의 규모에서 우리는 주변 환경 요소가 은하 진화에 미치는 영향을 본다.
이 작은 지구 위 인간 세상에서도 환경의 효과는 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다른 환경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선택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특히 어린 시절의 경험은 한 사람이 성장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죽음이 환기하는 감정은 그렇게 뭉크의 예술혼을 평생토록 이끌어내었는지도 모른다. 실재적 경험이 시작을 불러일으키고, 예술적 영감이 마침표를 찍었던 것은 아닐까.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던 소설이 있었다. 작중의 주인공을 빌어 작가가 이야기하듯, 나는 이 소설을 아무 때나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기를 좋아했었는데, 처음 이 문구를 읽었던 스무살이 되던 겨울엔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종류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기도 한다. 따로 공부를 한다거나 어떤 종류의 특수한 연마를 거치지 않고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 속에 한 꺼풀 두 꺼풀 내려앉은 먼지자국처럼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나는 위의 작가가 위의 소설을 써내려갔던 나이보다도 더 많은 나이가 되어서, 결과적으로 집필 당시의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산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이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이 단순해보이는 한 마디가 어떤 뜻인지 알 것만 같다.
9월 25일 오늘, 동문회로부터 학교 선배의 부고 문자를 받았다. 연구실은 달랐지만 같은 학과의 선배였다. 학부 때부터 대학원 생활을 할 때까지 6층 학과의 복도에서, 문헌정보실에서, 매점에서, 종종 보았고 가끔은 같이 축구를 하기도 했다. 선배의 아내분과는 일 년 동안 연구실을 같이 사용하기도 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고양이의 유골함이 있다. 그녀는 아홉 해를 나와 같이 보내고 열 번째 새해가 오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같이 살고 있는 아이도 언젠가는 어떤 이유로 이 곳을 떠날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뭉크가 아니라서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예술혼이 있다거나, 그것이 창작의 장작이 되어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도 없을 것을 안다. 다만 죽음이라는 이 두 음절을 끊임없이 곱씹으면서 오늘도 이 유한한 생의 한가운데를 조심스레 걷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